[IT동아 남시현 기자] 한때 반짝하고 저물었던 UMPC(Ultra Mobile Personal Computer, 초소형 개인용 PC) 시대가 이제는 열릴까? UMPC는 2006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제안한 ‘오리가미 프로젝트’에서 기인한 폼팩터(제품 형태)로, x86 데스크톱의 핵심 구성 요소인 디스플레이와 프로세서, 그래픽 카드, 저장 장치, 메모리 등을 초소형화한 휴대용 컴퓨터다. 당시 오리가미 프로젝트는 낮은 시장성 등으로 인해 어그러졌지만, 초소형 부품을 활용해 휴대용 미니 PC를 만든다는 구상은 그대로 남아 10여 년 넘게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MPC가 생소한 규격인 이유는 제대로 된 제품이 등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초소형 PC라는 개념 자체는 실현 가능성이 있었지만 2010년 이후로는 스마트폰이 초소형 PC의 위치를 차지했고, 노트북도 1kg 미만의 초경량화를 이루며 설 자리를 잃었다. 또한 아이패드나 태블릿PC등이 UMPC의 자리를 차지한 것도 영향을 미쳤고, 가격 경쟁력이 부족하며 적절한 x86 하드웨어가 없었던 점도 이유가 됐다. 하지만 지난해 2월 출시된 스팀덱이 시장에 또다시 불씨를 놓았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UMPC 시장이 완전히 새롭게 시작했다.
밸브 코퍼레이션, UMPC 시장을 재해석하다
스팀덱은 스팀 플랫폼 게임을 구동할 수 있는 UMPC 형태의 휴대용 게임기다. 출처=밸브
밸브 코퍼레이션은 1998년 ‘하프라이프’로 유명해진 미국의 게임 개발사로, 2004년 하프라이프 2를 발매할 때 게임 엔진과 온라인 배급 플랫폼 ‘스팀(Steam)’을 함께 공개했다. 초창기 스팀은 온라인으로 게임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도구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후 라이브러리를 늘려가 2023년 기준 5만 여 개의 선택 가능한 게임과 최대 3천200만 명이 동시 접속하는 세계 최대 게이밍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현재 스팀은 데스크톱 게임 플랫폼 중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스팀이 UMPC 시장에 뛰어든 이유는 게이밍 시장의 특성과 기술의 발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우선 게이머들은 꾸준히 최신 게임을 선호하고, 이에 맞춰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한다. 하지만 스팀 입장에서는 게임이 팔릴 때마다 수익이 나고, 게임사들 역시 신작 효과가 끝나고 꾸준히 게임을 팔아야 이익을 내기 때문에 몇년 지난 게임이더라도 게이머들이 다시 찾길 바란다. 문제는 게이머들이 최신 게임에 맞춰 컴퓨터를 맞추니 굳이 지난 게임을 사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팀덱은 성능 타협을 통해 약 2시간에서 최대 8시간까지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출처=밸브
한편 과거의 UMPC는 노트북 프로세서 중에서도 저전력 버전을 탑재했다. 배터리 용량이 부족한 데다가, 프로세서의 소비전력 대 성능비가 떨어져 고사양 프로세서를 쓸 수도 없었다. 성능은 떨어지고, 사용 시간도 짧으니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배터리 기술도 성숙했고, 모바일 프로세서로도 몇 년 전 데스크톱 프로세서에 준하는 그래픽 성능을 낼 수 있다. 게이밍 노트북보다 더 가볍고, 스마트폰보다 훨씬 더 성능이 뛰어난 휴대용 게이밍 PC를 만들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스팀덱은 이런 수요들을 조합한 끝에 나온 기기다. 프로세서는 AMD 라이젠 4코어 8스레드 프로세서를 탑재하고, 16GB 메모리를 갖춘다. 배터리는 40Wh를 탑재해 최소 2시간에서 8시간까지 사용할 수 있으며, 7인치 HD(1280x800) 해상도 디스플레이를 갖췄다. 좌우에 조작을 위한 조이스틱이 함께 연결된 타입이며, 전체 무게는 669g이다.
덕분에 GTA5나 데스스트렌딩처럼 스마트폰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PC 게임도 안정적으로 구동하고, 둠 이터널이나 사이버펑크 2077 같은 최신 게임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선택 가능한 게임도 적고 성능도 떨어져 사장됐던 UMPC가 다시 게이밍 시장의 주류 선택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AMD, UMPC 전용 CPU ‘라이젠 Z1 시리즈’ 공개
AMD가 젠4 아키텍처 기반의 UMPC 프로세서, 라이젠 Z1 시리즈를 공개했다. 출처=AMD
스팀덱이 UMPC 시장에 배를 띄우자, CPU 제조사인 AMD 역시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지난 4월 26일, AMD는 노트북이 아닌 휴대용 게임기를 위한 전용 프로세서인 ‘AMD 라이젠 Z1’ 시리즈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라이젠 Z1 시리즈는 6코어 12스레드와 4개의 RDNA 3 컴퓨팅 유닛을 가진 라이젠 Z1과 8코어 16스레드, 12개의 RDNA 3 컴퓨팅 유닛을 가진 AMD Z1 익스트림 두 종류로 출시된다. 스팀덱이 AMD 젠2 아키텍처 기반의 4코어 8스레드에 8개의 RDNA 2 컴퓨팅 유닛을 갖췄으니 스팀덱보다 고성능 게임을 더 원활하게 즐길 수 있다.
AMD 라이젠 Z1 시리즈의 등장은 그간 지지부진했던 UMPC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전망이다. 그간 UMPC의 경우 모바일 프로세서를 그대로 활용하는 등의 한계가 있었지만, AMD 라이젠 Z1은 그래픽 성능이나 소비전력 등이 노트북이 아닌 휴대용 게임기와 UMPC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에이수스는 오는 5월 11일에 AMD 라이젠 Z1을 바탕으로 하는 ‘에이수스 ROG 엘라이(Ally)’라는 휴대용 게임기를 발표할 예정이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Z1을 활용해 하드웨어만 제조하면 되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UMPC가 등장할 것이다.
휴대용 게임기 시장, UMPC가 촉매제 될 것
오는 5월 11일, AMD 라이젠 Z1 기반의 에이수스 ROG 엘라이가 공개될 예정이다. 출처=에이수스
시장조사기관 암페어 애널라이시스(Ampere Analysis)가 조사한 2022년 글로벌 콘솔 게임기 시장 점유율을 살펴보면, 전체 콘솔 게임기 중 닌텐도 스위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27.7%였다. 닌텐도 스위치는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와 다르게 무게 420g의 휴대용 게임기다. 콘솔 게임기인 만큼 전용 타이틀만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제약은 있지만, 많은 게이머들이 휴대용 게임기라는 특성에 매료돼 닌텐도 스위치를 선택하고 있다.
닌텐도 스위치를 통해 UMPC 등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성공 가능성은 증명된 상황이다. 그리고 스팀덱을 통해 하드웨어 성능과 플랫폼의 자유도를 모두 확보할 수 있음도 확인됐다. 여기에 AMD가 휴대용 게임기를 위한 AMD 라이젠 Z1을 내놓은 만큼 다양한 제조사에서 휴대용 게임기가 출시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지난 10여년 이상 그늘에 가려져왔던 UMPC가 이번에는 주류 시장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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